“엔터테인먼트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읽고

1.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요약하면,

“예배 때 사용되는 찬양에서 워십송과 CCM을 분리하고, 예배 때에는 복음의
전달에 적합하지 않은 매체를 사용하는 음악(락)과 CCM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듯 하다.

책은 락 그리고 CCM이 “나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것이 예배 상황에서 쓰이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도 이러한 주장에는 일정 부분 동의한다. “세상과 교회의 가교가 되고자” 하는 CCM의 역할에는 동의하나, 교회 내에서
CCM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차고 넘치지 않는다는 점은 비교적 명백하다.

락 음악적 요소가 교회 내에서 더욱 심해지게
되면 그것이 복음의 전달을 방해하게 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동의한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암 8:11)

2.

예배 때 사용되는 찬양곡에 대한 더 많은 고민들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나도 어느정도 동의한다.


넋두리”와 큰 차이가 없는 찬양,

지나치게 개인적인 내용의 가사를 가진 찬양,

가요와 큰 차이가 없는
찬양,

혹은 말씀 짜집기로 만들어져서 주제의 통일성이 없는 찬양,

그리고 지나치게 모호한 가사의 찬양들이
단지 “음악성이 좋고, 분위기가 고조된다”는 이유만으로 예배 때 사용되는 것은 지양될 필요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한다.

3.

책에서는 “스타 찬양인도자”가 된 분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나 역시 이분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 이분들도 본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작과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은 어딘가 찬양 인도자의 올바른 포지션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동시에 찬양 인도자가 전체
예배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무언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4.

저자가 말하는 원론적인 말들에 대해서 분명 이해가 가고 수긍하는 부분들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저자는 현장에서 직접 찬양인도를 해 본 경험자는 아니며, 또한 매주 직접 설교를 하는 설교자의 입장에서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저자가 이러한 부분들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웬만한
찬양인도자, 설교자보다도 훨씬 풍성한 인사이트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몇 가지 부분에 있어서 균형이 부족하지는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먼저, 예배 때 다루어야 할
“주제”와 “중심”에 대한 차이이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중심이자 중요한 주제이다. 그것을 오도하거나, 혹은 아예
다루지 않는 것은 분명 올바른 설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에 십자가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 외에는 할 이야기가 없는 것도 또한 아니라고 생각한다.

설교 때 “십자가”를 가감없이 전달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지만, 정말 그것만이 전달할 메시지라면, 단순히 성경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 설교가 끝나도 되는 것은 아닌가? 설교자가 필요가 없지 않는가?

굳이 설교라는 형식을 비는 것은,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의 주관이 어느정도 반영됨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는 십자가 외에도 기독교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말씀을 듣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며, 십자가는 그것의 “시작”이지 “주춧돌”이지, 그것만이 전부이자
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5.

또 다른 하나는 음악 스타일에 대한 부분이다.

과연 락을 예배 음악에 사용하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인가? 저자는 락의 주된 특징으로 싱코페이션의 과도한 사용, 오프
비트, 후렴의 반복 등을 들고 있다.

하지만 락 내에도 무척 많은 서브 장르들이 존재하며, 그것을 표현하는 음악
스타일에도 많은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드럼이나 베이스 비트만 하여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는 많은 차이점들이 있다.

게다가 락을 제외한 음악에서도 싱코페이션, 오프 비트, 반복된 후렴등이 쓰인다. 이 둘의 경계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큰
범위에서 뭉뚱그려서 “락”이라고 칭하는 것이지, 사실 그 내에서도 수많은 변형들이 있을 수 있으며, 가사 내용의 전달성 vs.
음악적 전달성 측면에서 그 균형을 찾기가 어려운 경우도 많이 존재한다.

게다가, 음악은 듣는 사람의 환경, 익숙함의 정도, 경험, 취향 등에 따라서 확연히 다를 수도 있다!

처음
듣는 음악의 경우에는 음악의 멜로디나 강렬한 드럼 비트에 끌릴 수도 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가사의 내용이 더 전달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곡은 듣는 사람에게 있어서 확실하게 “락”으로 들릴 수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을 뭉뚱그러서 “락”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스타일로 종합하고, 그것을 교회 내에서 제거하자고 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는 주장이라고 본다.

분명 음악 스타일이 찬양곡의 메인이 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구분하는
절대적 기준을 찾기는 쉽지가 않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6.

또다른 한 가지는, 음악이 가지는 “감성을 업시키는” 효과에 대해 우리가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성과 감성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균형있게 함께 가야 한다.

예를 들자면, 이성이
자동차의 핸들링이라면, 감성은 자동차의 엔진이라고 보면 된다. 이성이 방향을 결정한다면, 감성은 속도를 결정한다.

감성만을 너무 앞세운다면 그것은 눈감고 운전하는 자동차와 같이 어디로 튈지 모르게 된다. 반면 이성만을 너무 강조한다면,
방향은 올바르나 그것을 붙들고 나갈 감성적 결단은 약화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가지는 하나님의 소중한 창조물이며,
함께 붙드는 것이다.

찬양은 분명 이성보다는 상당히 많은 감성을 좌우하는 행위이다.

올바른 방향이 없이
감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분명 위험하다. 그것은 제목 그대로 “엔터테인먼트에 물든 기독교”이다.

하지만, 올바른 이성의 방향이 제대로 잡혀있다면, 감성을 강화시켜주는 것도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감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도 하고, 눈물도 흘릴 수 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 하나님께 가깝게 나갈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를 들었을 때 “마음의 뜨거움”이 없다면, 내가
죄인이라는, 그래서 부끄럽다는 “감성”이 없다면 우리가 회개를 할 수 있을까?

7.

그럼에도 책에서는 몇 가지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 인도자들이 회중들이 부르는 찬양곡들의 가사와 그 의미에 대해 더 깊이있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많이 불리는 찬양이, 반드시 올바른 찬양은 아니다.

8.

책에서는, 찬양 곡들에는 “나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곡이 있고,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곡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보다 엄밀히 분류하면,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전자를 “Praise”, 후자를 “Worship”이라고 부른다.
(반대였었나?)

그리고 “Praise”에 해당하는 곡들을 예배 때 지나치게 부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Worship”곡이라 하여도 그 가사 내용 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모호한 찬양곡은 부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예배곡의 분류와 선별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 번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을 듯 하다.

Q.
찬양의 목적에 대해 우리가 좀 더 심도있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배에 대해 “마음 문을 열기 위해” 찬양을
드린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것은, 찬양의 주체가 “나”의 감정에 대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예배 안에서 찬양이 차지해야 할 올바른 위치는 무엇일까?

Q. 자신이 아는 찬양곡 중에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에 지나치게 초점을 두고 있는 곡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Q. 가요와 별반 차이가 없는
찬양에는 어떤 곡들이 있을까?

Q. 위와 같은 곡들을 포함한 “Praise Song”들은 아예 사용되지 않아야 할까?
만약 사용된다면 어떠한 상황에서 쓰여야 할까?

Q. 그렇다면 “나 자신”보다는 “하나님”께 초점을 두고 있는 찬양에는 무엇이 있을까?

Q. 모호한 가사와
반복적 전달로, 복음에 대한 흐린 이미지를 주는 찬양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Q. 콘티를 짤 때, 메시지 측면에서 별
의미가 없는 “채워넣기 곡”(Filler Song)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Q. 가요적 성향이 지나치게 강한 찬양에는 무엇이 있는가?

Q. 반복적인 후렴 전달은 반드시 지양해야 하는
종류의 것인가? 그렇다면, 혹은 그렇지 않다면, 이유는?

Q. 모호한 가사는 반드시 지양해야 하는 종류의 것인가?
그렇다면, 혹은 그렇지 않다면, 이유는?

9.

책에서는 CCM의 올바른 위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나 역시 CCM이 “세상 사람에게 전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기독교인들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주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전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실제적 현실을 반영하면 그렇다.

전자의 시각은, “세속”과 “교회”로 분리하는 이원론적 시각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CCM의 올바른 위치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이원론적 세계관부터 극복해야 한다.

책의 마지막에 언급되는 일원론적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공 뿐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도 영광 받으신다. 헨델의 “메시야” 뿐 아니라, 베토벤의 교향곡으로도 하나님은 영광 받으신다.
그러한 면에서 CCM의 정의는 더 넓어질 수 있다.

어쩌면 교회 내에서의 가장 큰 적은 아직도 남아있는 이원론적
뿌리가 아닐까 싶다. 물론 지금은 “세상”과 “교회”로 구분하고,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교회에서만 써먹어야지 하는 이원론이 많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이원론에 대한 극복은, 꼭 읽어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342-343]

10.

제대로 된 CCM이 한국에서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나도 공감한다. 대부분의 찬양곡들의 수요은, 찬양 인도자와 찬양팀을 위한 것이며,
회중들이 예배 때 부르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CCM과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11.

장르에 대해 좀 더 폭넓은 논의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사가 있지 않는 음악은 CCM에 속하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가 거부해야 하는 것인가? 이를 엄밀하게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있는가?

12.

여러가지 면에서 생각할 부분들이 많은 책이었다.

다소 극단적인 부분들도 있고, 동의하기 힘든 부분들도 있었지만,
찬양팀에서 함께 읽고 예배 때 부르는 찬양곡들에 대한 깊이있는 고민과 나눔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많은 동의가 가는 부분이다.


대화에 참여

댓글 2개

  1. 공감합니다 저자의 의견에 어느정도 공감하지만 예배인도자로써 조금 아쉬운 내용이 있네요 글 감사합니다

    1. 예 실제로 예배인도하시는 분들이 보기에는 조금 부족한 부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점 제외하면 문제 제기를 하는 책으로는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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