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하는 코드 리뷰 툴 Phabricator

최근 같은 프로젝트에서 일하는 분과 원격으로 소스 코드를 공유하면서 작업해야 할 일이 생겼다.

구글에서는 내부적으로 Critique 이라는 코드 리뷰 툴이 있는데, 아직 오픈 소스로 공개되지 않은지라 외부에서 쓸만한 툴이 있는지 알아보니, 페이스북에서 오픈 소스로 공개한 Phabricator 가 가장 쓸만해 보였다.

내가 본 Phabricator의 주요 장점으로는

  • 주요 버전 관리 시스템(git, hg, svn)에서도 잘 동작하고, 외부 저장소(github, bitbucket)와도 잘 연동됨.
  • 주요 기능들을 잘 갖추고 있는 코드 리뷰 도구
  • 용이한 프로젝트 관리 및 버그 관리 도구
  • 여러 사용자에 대한 지원이 잘 되어 있음 (권한 관리 등)
  • 제출 전 코드 리뷰(differential) 뿐만 아니라 제출 후 코드 리뷰(audit)도 지원

등이 있다. 아직 문서화가 제대로 안되어 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디자인도 깔끔하고 실제 프로젝트에서 언제든 사용되어도 괜찮을 기능들을 많이 갖추고 있다.

현재로서는 github 처럼 편하게 가입해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사이트에 직접 설치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일단 설치하면 그 이후부터는 강력한 기능들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러명이서 같이 코드 리뷰 하면서 작업해야 하는 경우에는 꼭 추천하는 툴이다.

홈페이지 방문 : http://phabricator.org

“엔터테인먼트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읽고

1.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요약하면,

“예배 때 사용되는 찬양에서 워십송과 CCM을 분리하고, 예배 때에는 복음의
전달에 적합하지 않은 매체를 사용하는 음악(락)과 CCM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듯 하다.

책은 락 그리고 CCM이 “나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것이 예배 상황에서 쓰이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도 이러한 주장에는 일정 부분 동의한다. “세상과 교회의 가교가 되고자” 하는 CCM의 역할에는 동의하나, 교회 내에서
CCM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차고 넘치지 않는다는 점은 비교적 명백하다.

락 음악적 요소가 교회 내에서 더욱 심해지게
되면 그것이 복음의 전달을 방해하게 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동의한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암 8:11)

2.

예배 때 사용되는 찬양곡에 대한 더 많은 고민들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나도 어느정도 동의한다.


넋두리”와 큰 차이가 없는 찬양,

지나치게 개인적인 내용의 가사를 가진 찬양,

가요와 큰 차이가 없는
찬양,

혹은 말씀 짜집기로 만들어져서 주제의 통일성이 없는 찬양,

그리고 지나치게 모호한 가사의 찬양들이
단지 “음악성이 좋고, 분위기가 고조된다”는 이유만으로 예배 때 사용되는 것은 지양될 필요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한다.

3.

책에서는 “스타 찬양인도자”가 된 분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나 역시 이분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 이분들도 본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작과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은 어딘가 찬양 인도자의 올바른 포지션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동시에 찬양 인도자가 전체
예배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무언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4.

저자가 말하는 원론적인 말들에 대해서 분명 이해가 가고 수긍하는 부분들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저자는 현장에서 직접 찬양인도를 해 본 경험자는 아니며, 또한 매주 직접 설교를 하는 설교자의 입장에서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저자가 이러한 부분들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웬만한
찬양인도자, 설교자보다도 훨씬 풍성한 인사이트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몇 가지 부분에 있어서 균형이 부족하지는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먼저, 예배 때 다루어야 할
“주제”와 “중심”에 대한 차이이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중심이자 중요한 주제이다. 그것을 오도하거나, 혹은 아예
다루지 않는 것은 분명 올바른 설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에 십자가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 외에는 할 이야기가 없는 것도 또한 아니라고 생각한다.

설교 때 “십자가”를 가감없이 전달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지만, 정말 그것만이 전달할 메시지라면, 단순히 성경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 설교가 끝나도 되는 것은 아닌가? 설교자가 필요가 없지 않는가?

굳이 설교라는 형식을 비는 것은,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의 주관이 어느정도 반영됨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는 십자가 외에도 기독교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말씀을 듣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며, 십자가는 그것의 “시작”이지 “주춧돌”이지, 그것만이 전부이자
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5.

또 다른 하나는 음악 스타일에 대한 부분이다.

과연 락을 예배 음악에 사용하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인가? 저자는 락의 주된 특징으로 싱코페이션의 과도한 사용, 오프
비트, 후렴의 반복 등을 들고 있다.

하지만 락 내에도 무척 많은 서브 장르들이 존재하며, 그것을 표현하는 음악
스타일에도 많은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드럼이나 베이스 비트만 하여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는 많은 차이점들이 있다.

게다가 락을 제외한 음악에서도 싱코페이션, 오프 비트, 반복된 후렴등이 쓰인다. 이 둘의 경계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큰
범위에서 뭉뚱그려서 “락”이라고 칭하는 것이지, 사실 그 내에서도 수많은 변형들이 있을 수 있으며, 가사 내용의 전달성 vs.
음악적 전달성 측면에서 그 균형을 찾기가 어려운 경우도 많이 존재한다.

게다가, 음악은 듣는 사람의 환경, 익숙함의 정도, 경험, 취향 등에 따라서 확연히 다를 수도 있다!

처음
듣는 음악의 경우에는 음악의 멜로디나 강렬한 드럼 비트에 끌릴 수도 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가사의 내용이 더 전달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곡은 듣는 사람에게 있어서 확실하게 “락”으로 들릴 수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을 뭉뚱그러서 “락”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스타일로 종합하고, 그것을 교회 내에서 제거하자고 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는 주장이라고 본다.

분명 음악 스타일이 찬양곡의 메인이 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구분하는
절대적 기준을 찾기는 쉽지가 않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6.

또다른 한 가지는, 음악이 가지는 “감성을 업시키는” 효과에 대해 우리가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성과 감성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균형있게 함께 가야 한다.

예를 들자면, 이성이
자동차의 핸들링이라면, 감성은 자동차의 엔진이라고 보면 된다. 이성이 방향을 결정한다면, 감성은 속도를 결정한다.

감성만을 너무 앞세운다면 그것은 눈감고 운전하는 자동차와 같이 어디로 튈지 모르게 된다. 반면 이성만을 너무 강조한다면,
방향은 올바르나 그것을 붙들고 나갈 감성적 결단은 약화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가지는 하나님의 소중한 창조물이며,
함께 붙드는 것이다.

찬양은 분명 이성보다는 상당히 많은 감성을 좌우하는 행위이다.

올바른 방향이 없이
감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분명 위험하다. 그것은 제목 그대로 “엔터테인먼트에 물든 기독교”이다.

하지만, 올바른 이성의 방향이 제대로 잡혀있다면, 감성을 강화시켜주는 것도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감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도 하고, 눈물도 흘릴 수 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 하나님께 가깝게 나갈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를 들었을 때 “마음의 뜨거움”이 없다면, 내가
죄인이라는, 그래서 부끄럽다는 “감성”이 없다면 우리가 회개를 할 수 있을까?

7.

그럼에도 책에서는 몇 가지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 인도자들이 회중들이 부르는 찬양곡들의 가사와 그 의미에 대해 더 깊이있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많이 불리는 찬양이, 반드시 올바른 찬양은 아니다.

8.

책에서는, 찬양 곡들에는 “나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곡이 있고,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곡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보다 엄밀히 분류하면,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전자를 “Praise”, 후자를 “Worship”이라고 부른다.
(반대였었나?)

그리고 “Praise”에 해당하는 곡들을 예배 때 지나치게 부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Worship”곡이라 하여도 그 가사 내용 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모호한 찬양곡은 부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예배곡의 분류와 선별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 번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을 듯 하다.

Q.
찬양의 목적에 대해 우리가 좀 더 심도있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배에 대해 “마음 문을 열기 위해” 찬양을
드린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것은, 찬양의 주체가 “나”의 감정에 대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예배 안에서 찬양이 차지해야 할 올바른 위치는 무엇일까?

Q. 자신이 아는 찬양곡 중에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에 지나치게 초점을 두고 있는 곡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Q. 가요와 별반 차이가 없는
찬양에는 어떤 곡들이 있을까?

Q. 위와 같은 곡들을 포함한 “Praise Song”들은 아예 사용되지 않아야 할까?
만약 사용된다면 어떠한 상황에서 쓰여야 할까?

Q. 그렇다면 “나 자신”보다는 “하나님”께 초점을 두고 있는 찬양에는 무엇이 있을까?

Q. 모호한 가사와
반복적 전달로, 복음에 대한 흐린 이미지를 주는 찬양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Q. 콘티를 짤 때, 메시지 측면에서 별
의미가 없는 “채워넣기 곡”(Filler Song)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Q. 가요적 성향이 지나치게 강한 찬양에는 무엇이 있는가?

Q. 반복적인 후렴 전달은 반드시 지양해야 하는
종류의 것인가? 그렇다면, 혹은 그렇지 않다면, 이유는?

Q. 모호한 가사는 반드시 지양해야 하는 종류의 것인가?
그렇다면, 혹은 그렇지 않다면, 이유는?

9.

책에서는 CCM의 올바른 위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나 역시 CCM이 “세상 사람에게 전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기독교인들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주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전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실제적 현실을 반영하면 그렇다.

전자의 시각은, “세속”과 “교회”로 분리하는 이원론적 시각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CCM의 올바른 위치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이원론적 세계관부터 극복해야 한다.

책의 마지막에 언급되는 일원론적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공 뿐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도 영광 받으신다. 헨델의 “메시야” 뿐 아니라, 베토벤의 교향곡으로도 하나님은 영광 받으신다.
그러한 면에서 CCM의 정의는 더 넓어질 수 있다.

어쩌면 교회 내에서의 가장 큰 적은 아직도 남아있는 이원론적
뿌리가 아닐까 싶다. 물론 지금은 “세상”과 “교회”로 구분하고,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교회에서만 써먹어야지 하는 이원론이 많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이원론에 대한 극복은, 꼭 읽어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342-343]

10.

제대로 된 CCM이 한국에서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나도 공감한다. 대부분의 찬양곡들의 수요은, 찬양 인도자와 찬양팀을 위한 것이며,
회중들이 예배 때 부르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CCM과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11.

장르에 대해 좀 더 폭넓은 논의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사가 있지 않는 음악은 CCM에 속하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가 거부해야 하는 것인가? 이를 엄밀하게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있는가?

12.

여러가지 면에서 생각할 부분들이 많은 책이었다.

다소 극단적인 부분들도 있고, 동의하기 힘든 부분들도 있었지만,
찬양팀에서 함께 읽고 예배 때 부르는 찬양곡들에 대한 깊이있는 고민과 나눔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많은 동의가 가는 부분이다.


찬양 콘티에도 저작권이 있을까?

본인은 High Worship Online이라는 온라인 찬양 콘티 작성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가까운 지인들만을 위한 사이트로 운영하고 있으나, 추후 정식으로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 클로즈 베타를 거쳐 오픈할 예정이다. 구체적인 시기는 미정이나, High Worship Songbook 2011 이 예솔 출판사를 통해 정식으로 출간될 때를 맞추지 않을까 싶다.

찬양 콘티를 publish 하는 사이트를 준비하는 입장으로서, 몇 가지 고려해야 하는 점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찬양 콘티”에도 저작권이 있을까 하는 점이다.

찬양 콘티는, 찬양 곡들을 특정한 주제 혹은 의도를 가지고 모은 연속적인 목록이다.

단어 하나하나에는 저작권이 없지만 그것을 모아서 문장 및 문단으로 만들고 책으로 만들면 저작권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콘티는 어떨까? 찬양 곡들을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늘어놓은 것이 찬양 콘티일진대, 저작권이 있을까?

본인의 생각은, 일차적으로는 “No” 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각 찬양곡들의 일차적 저작권이 해당 곡의 저작권 소유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찬양 콘티는 2차적 창작물로 보는 것이 옳으며, 이는 저작권법에 따라 1차적 저작권자의 허용 범위 내에서 제한적인 저작권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제한적으로 원 저작자의 허락 하에 콘티의 저작권이 발생할 수는 있지만, 원재료가 되는 찬양곡이 타인의 것인 이상 원천적 저작권은 존재하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으로서의 악보집의 미래

예전에 온라인 상의 콘티 작성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비슷한 컨셉의 서비스가 이미 상용화되어 있다:

http://www.worshipplanning.com

http://www.planningcenteronline.com

Planning Center Online 같은 경우에는 iphone 인터페이스를 지원하는 ㅎㄷㄷ한 모습까지 볼 수 있다.

아직 국내에는 온라인 콘티 작성조차도 활성되지 않은 형편이지만, 벌써 해외에서는 모바일 물결까지 준비하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악보집의 발전사를 세대별로 정리해보자면,

1세대 – 책 형태의 악보집

2세대 – CD 프로그램 형태의 악보집

3세대 – 인터넷 상의 악보집

4세대 –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으로서의 악보집

과 같은 형태가 되지 않을까 싶다.

현재 국내에서는 2세대까지가 활성화 된 단계이고, 미국 등 해외에서는 3~4세대까지 활성화가 된 상태이다.

그리고 4세대의 도래를 가능하게 할 도구로는, 역시 애플의 iPad를 들 수 있다.

애플의 iPad와 같은 기기는 컨텐츠 중심의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을 구동하기 위한 최적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iPhone이 다소 작은 화면 때문에 악보집 및 콘티 작성에 필요한 기능을 모두 구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반면 iPad는 훨씬 더 넓은 화면으로 쾌적한 콘티 작성을 가능하게 한다.

Cellvic 및 PocketPPC로 이런저런 어플을 작성해 본 경험이 있는지라 모바일 프로그래밍에 대해 대충은 알고있다. 그 시절에는 불편한 인터페이스 때문에 사용자 친화적인 프로그램 설계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애플 iPhone이 불러운 혁신으로 인해 좀 더 사용자가 다가가기 쉬운 모바일 컴퓨팅이 가능해졌다.

다만 문제는 악보 저작권 업체들과의 관계이다.

현재의 악보집 산업 구조에서는 아직 악보 저작권 업체들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여기에 부여된 각종 조건들 때문에 새로운 세대를 준비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형편이다. 당장 악보 다운로드만 해도, 악보를 구매한 이후 7일간만 다운로드가 가능하게 하는 등 제약 조건들이 많다.

게다가 미국의 CCLI 처럼 일원화된 곡 관리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소 중구난방 식으로 흩어져 있다보니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키는 것이 쉽지 않은 형편이다.

일단은 저작권 업체들의 공통된 인식이 제일 중요할 것 같다. 이러한 공통된 합의 아래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악보집 서비스들이 더 많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왜 사는가?”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통해 결론내린 인간의 존재 목적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은 1643년 7월 1일부터 1648년 2월 22일까지 영국의 장기의회가 영국 웨스트민스터에 소집한 성직자들과 의회원들의 유명한 전국적 회의에서 작성되었다.

처음에 상원의원 10명, 하원의원 20명, 그리고 성직자 121명이 소집되었으나, 후에 결석자들을 보충하기 위해 21명이 추가되었다. 수년에 걸쳐 지속된 이 회의들의 평균 출석수는 60~80명이었다.

소집된 인사들은 각각 감독교회, 장로교회, 독립교회, 에라스투스 제도를 대표하였으나, 1643년 영국과 스코틀랜드 양국간에 ‘엄숙한 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이 서명된 후 감독교회 인사들이 물러가고 출석자의 대다수는 장로교파였다. 독립파와 에라스투스파로 인한 끊없는 논쟁은 회의 진행을 1644년 말까지 지연시켰다.

결국 1646년 12월 3일에 신앙고백서가 의회에 제출되었으며, 의회의 지시에 따라 1647년 4월 29일에는 각 명제에 대한 성경구절 주석이 첨부되었다. 그 뒤를 이어 소요리문답은 1647년 11월 5일에, 대요리문답은 1648년 4월 14일에 보고되었다. 이 문서들은 영국 의회뿐만 아니라 완성되는 대로 스코틀랜드 총회가 비준했다.

그러나 크롬웰 군대에 의해 의회가 예속되자 곧 장로교 목사들이 축출되었다. 그는 강제로 장기의회를 해산시켰으며, 그에 따라 위원회는 해체되었다.

미국의 처음 지방노회가 1729년에 이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해으며, 이 문서들은 스코틀랜드와 영국과 아일랜드와 미국의 모든 장로교회들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국가적 교회에 대한 견해를 거부했던 미국의 지방노회는 신앙고백서 제20장, 제23장, 제31장 등의 일부를 수정했다. 이렇게 변경되고 수정된 신앙고백과 요리문답들이 미국 장로교회 교리 부분이 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위원회는 처음에 신앙고백과 요리문답들을 동시에 준비했으나, 얼마 진행한 후 우선 신앙고백서를 필하고, 그것을 표준으로 삼아 요리문답들을 작성하기로 결의했다.

1646 년 12월 3일에 완성된 신앙고백서를 회의의 이름으로 국회에 제출했고, 국회는 그 각 부분에 성경구절을 난외(欄外)에 방주(傍註)를 달라고 지시했다. 회의는 마침내 각 명제에 대한 성경구절을 완전히 첨부해서 1647년 4월 29일에 의회에 보고했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의의는?

장로교의 신학적 근거는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요약한 것이 “소요리문답”으로서 다루는 대상은 매우 광범위한데, 그 첫번째 질문과 대답이 인상적이다. 소요리문답에서는 인간의 존재 목적을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소1. 사람의 첫째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 사람의 첫째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왜 사는가?”는 질문에 대해 내린 가장 명쾌한 답이자, 크리스천의 신앙 원리와 핵심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삶의 목적을 다른 무언가를 이루는 것으로 정의하곤 한다. 인간은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으며,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간다고. 그것이 때로는 전도, 혹은 선교라는 이름으로 치환되기도 하고, 직업적 소명으로 귀결되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은 수단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삶의 목적을 추구하면서 나오는 부차적인 산물일 뿐이지, 삶의 목적 그 자체는 아니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일을 시키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노예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자유인으로 창조하셨다. 인간의 죄 때문에 노동이라는 굴레를 부여하셨지만, 그렇다고 일을 하는 것, 무언가 사명을 이루는 것 자체가 우리 인간의 목적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충격일 수도 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고 해 보자. 그런데 그 남자는 여자에게 자꾸 무엇인가를 해 주려고 한다. 그럴때면 이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그런거 없어도 네가 나 사랑하는 거 알아. 그냥 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해주고, 나로 인해서 기뻐해주기만 하면 돼”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와 같다. 하나님을 위해서 너무 많은 “무엇인가를 해 드리려” 할 필요 없다. 하나님은 그런 것 없이도 충분히 영광스러우신 분이고, 부족함 없으신 분이다. 그러니 그냥 하나님을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된다. 많은 것을 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그냥 그 분의 존재를 영광스럽게 높여드리고, 그 분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된다. 그것이 바로 예배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삶의 목적이다.

거기에 비전, 삶의 목적, 소명, 그러한 말을 덧붙일 필요 없다. 그런 것 없어도, 단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 만으로도 우리 인간은 이미 충분히 자신의 삶의 목적을 다 한 존재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의 첫번째 되는 질문이자 답변이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 대한 설명 참조 : http://www.nazuni.pe.kr/faith/creeds/westminster/

[예배] 제발 예배 중에 회중을 카메라로 잡지 말아주세요!

많은 큰 교회에서는 예배 실황을 영상으로 만듭니다. 오늘은 그 카메라 샷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보고자 합니다.

악보 편집 작업중에 이번에 신곡으로 추가된 Paul Baloche의 “Wonderful God” 영상을 보는 중이었습니다.

Youtube : http://www.youtube.com/watch?v=7yPX1AJzgcY

영상을 보는데, 뭔가 한국의 예배랑 많이 다른 것 같더군요. 뭐가 다르지? 하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바로 카메라 앵글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드려지는 예배와는 다르게 회중을 카메라에 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예배 인도팀에게 초점을 맞추더군요.

그리고 제게는 그것이 매우 편하게 다가왔습니다. 무엇보다도 정말 예배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제 한국 출석교회는 여의도순복음교회입니다. 한국에 가서 예배 드릴때마다 적응이 잘 안되는 부분이, 바로 큰 스크린으로 회중의 얼굴을 비춰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중이 무척 높습니다. 적어도 50%의 시간은 이른바 “은혜롭게 찬양하는 회중들”의 모습을 잡아서 비춰주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게 불편했습니다.

뭐랄까요, 사람마다 반응이 다를 수 있겠지만, 저는 솔직히 “민망하다”고 느낍니다. 익숙해지신 분들이 있을수도 있고, 다른 회중들이 “은혜롭게” 예배하는 모습을 보고 도전을 받으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불편하고 민망합니다.

왜 예배중에 제가 생판 모르는 남 얼굴을 감상하고 있어야 하나요? 그 사람이 예배를 드리건 지지고 볶던간에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가 아닌가요? 무엇보다도 다른 회중들의 모습을 보면서 더 하나님께 잘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얼굴이 잡힌 사람들이 그나마 멀쩡히(혹은 담담한 척 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 그래도 조금은 낫습니다. 몇몇 회중들은 “당황해서” 급히 얼굴을 홱 돌리거나,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심지어는 실소를 터트리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배에는 초상권도 가질 수 없습니까? 왜 동의도 없이 지멋대로 얼굴을 찍어가는 겁니까? 조금이라도 아는 지인이 예배중에 스크린에 나오면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촬영 담당 팀들은 아는지나 모르겠습니다. 아, 모를려나요. 그 사람들은 저 뒤쪽에 앉아서 카메라 돌리라고 지시만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더 분통터지는 것은 자꾸 사람들이 민망해하니까 아예 예배 시작할 때 공지를 띄우더군요.

“예배 중간에 카메라에 얼굴이 잡히더라도 평상시처럼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아, 알겠습니다. 우리에게 인내심과 평정심을 훈련시키려는 것이군요. 그래서 어떠한 카메라 앵글이 와도 당황하지 않게끔 하는 것을 연습시키려는 것이었군요.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람들이 민망해하는 이유는 딱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예배중에 회중이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의도 없이 강제로 얼굴을 찍어가니까 민망한 것이지요. 그 어색한 반응을 보는 사람들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이구요.

까놓고 말하겠습니다. 저도 남자이니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화면에 자매들 얼굴이 나오면 집중이 안 됩니다. 그건 제 의지와는 관계없는 겁니다. 지나가는 여자들 있으면 아무래도 남자들이 한 번 힐끗 보게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주의력이 흐트러지고 집중이 분산됩니다. 한 번이면 괜찮습니다. 문제는 그걸 예배 내내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고 나면 괜히 열받습니다. 나는 조용히 곡에 집중하고, 가사에 집중해서 예배를 드리고 싶은데, 자꾸 화면이 나를 방해합니다. 저만 그런건가요?

짜증이 나서 요즘은 아예 예배를 처음부터 끝까지 눈감고 드립니다. 그런 분들 요즘 많이 생기신 것 같더군요. 아, 생각해보니 영상으로 자꾸 비춰주는 것은 눈감고 집중해서 예배드리라는 말인지도 모르겠군요. 아예 곡이랑 가사도 다 외우는 효과도 있겠군요. 가사 모르면 눈감고 부를 수 없으니까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곡 가사까지 암기하게 되었네요. 그런 의도가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비단 이 문제는 저만 느끼는 것은 아닐 겁니다. 홀리기타에도 아래와 같은 글들이 올라와 있습니다:

http://www.holyguitars.com/home/bbs/board.php?bo_table=talk&wr_id=53336&sfl=&stx=&sst=wr_datetime&sod=asc&sop=and&page=408

예배 중의 회중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고자 하는 영상팀의 욕심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좀 더 다이나믹하고 회중의 반응이 있는 영상이 만들어지긴 할 겁니다. 기록물로서의, 혹은 상영물로서의 영상의 가치는 물론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웹 스트리밍으로 예배를 드리는 경우도 있고, 또한 본 성전의 예배를 영상으로 전송해서 드려야 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이런 것도 간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배는, “보여주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드려지기”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배워온 바에 의하면, 예배를 인도하고 혹은 서포트 하는 사람들이 꼭 지켜야 할 절대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회중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
2. 회중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


3. 회중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절대 원칙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그것이 음향이든, 선곡이든, 영상이든, 회중에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때로 필요하다면 악기마저도, 음향마저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아쉽게도 많은 한국 교회에서 그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는 “보여주기”를 위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더 좋은 영상물을 뽑아낸다고 하면서, 혹시 더 귀중한 것은 잃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물론, 가끔 다른 회중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또한 그들이 은혜롭게 찬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되는” 회중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령 몇몇 사람들이 그렇게 느낀다고 하여도, 대다수의, 혹은 일부의 회중들에게 있어 그것이 예배하는 것에 있어 장애가 된다면, 하지 않는 것이 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도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고 누군가가 불편함과 짜증을 느끼고 있다면, 예배를 잘못 디자인하고, 잘못 섬기고 있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는 각 교회의 영상팀 분들께서는 한 번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회중을 고려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집중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서 한 번 논의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는 짧게 한 번 답글 달아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Q) 예배 중에 회중을 앵글로 잡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여기에서 회중을 잡는 다는 것은 전체 회중을 두리뭉실하게 잡는 것이 아니라, 한두명의 개별적인 사람들이 찬양하는 모습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보여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미있는 토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의견들도 좋으니 남겨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당신의 예배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찬양 인도자에게 있어 가장 어렵고 힘든 일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콘티 작성을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힘든 이유는, 콘티 작성은 기술(Technique)이 아니라 예술(Art)에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0년이 넘게 찬양 인도를 해 온 경험있는 찬양인도자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콘티 작성은 쉽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일에 속합니다. 경험과 기술이 쌓이면 전조와 브릿지 등과 같은 많은 기법들을 활용할 수도 있고, 자신만의 색채를 담아 콘티를 작성할 줄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콘티 작성은, 마치 새로운 작품을 그리는 아티스트가 맞닥뜨리는 것처럼 신비롭고 난해하며 익숙하지 않은 일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콘티 작성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데이트를 위해 데이트 코스를 짜는 것에 비유하여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그녀를 감동시키기 위해 무슨 옷을 입고 나타날지, 어떤 선물을 할지, 어느 거리를 걸으며 어디서 식사를 할지, 모든 것 하나하나가 쉽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결정에 속합니다. 이는 오랫동안 교제해온 애인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찬양 콘티도 마찬가지 입니다. 콘티 작성을, 하나님과의 공식적인 데이트 코스를 짜는 것으로 생각해 봅시다. 사랑하는 하나님과의 데이트를 위해, 그분의 깊은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는 18번 곡들을 넣을 수도 있고, 새로운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듯 새로운 곡으로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와 같은 신선한 곡으로 찬양할 수도 있고, 정동진에서 경이로운 일출을 함께 바라보듯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예배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 준비하는 과정은 분명 힘겹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힘들면서도 왜 한편으로는 기쁜가요? 그것은 평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많은 연인들이 유사한 영화관에서 유사한 영화를 보고, 유사한 커피숍에 가서 유사한 화제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과의 만남도 유사한 예배당에서 유사한 교인들과 유사한 찬양을 부른다 할지라도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데이트는, 생산하고 소비되는 제품(product)이 아니라, 비슷해 보여도 모든 만남 하나하나가 소중한 의미를 가지는 작품(masterpiece)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는, 기계적으로 생산되는 제품이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상징하는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콘티 작성은 기술(technique)이 아닌 예술(art)입니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적당히 찬양곡을 붙여가면서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데이트를 준비하듯 작성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콘티 작성은 힘들고 익숙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오랫동안 찬양 인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졌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애인과의 만남이 익숙한 듯 하면서도 늘 새롭고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와 함께 새로운 작품을 그려나가야 하는 찬양 인도는 아무리 유사해 보인다고 해도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 콘티에는 모방(imitation)은 있을지 몰라도, 복제(duplication)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찬양 콘티 하나하나가 독특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콘티 작성에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든다면,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기계적인 것이 되지는 않았나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예배 인도는 익숙해지기 힘든 것 같습니다. 아직 예배를 준비할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남아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첫 만남, 그분의 임재를 처음 체험했을 때의 떨리는 설레임이 남아 있나요? 혹시라도 그 마음이 사라진 찬양 인도자가 있다면, 잠시 작성하던 콘티를 덮어둡시다. 큐 시트(cue sheet)와 리드 시트(leed sheet)도 치워둡시다. 데이트의 중심은, 바로 사랑하는 그녀 자체예요. 사실 그녀와 함께라면 영화관에 가든, 식사를 하든, 강변을 거닐든 수다를 떨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중요한건 누구와 함께 있느냐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아닐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의 중심은 바로 사랑하는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라면, 그곳이 광야이든 푸른 초장이든 관계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맷 레드먼(Matt Redman)의 Heart of Worship(예배의 중심) 은 이러한 예배자의 마음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는 명곡입니다. 원곡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의역을 해 보았습니다.

When the music fades All is stripped away
And I simply come
Longing just to bring Something that’s of worth
That will bless Your heart

음악이 사라질 때 모든 것들은 벗겨져 버리고
저는 꾸밈없이 나옵니다.
다만 당신을 기쁘게 할
가치있는 그 무언가를 드리기 갈망하면서

I’ll bring You more than a song For a song in itself
Is not what You have required
You search much deeper within Through the way things appear
You’re looking into my heart

저는 당신께 노래 이상의 것을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노래 그 자체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눈으로 보이는 것 속에 있는 훨씬 더 깊은 것을 찾으십니다.
당신께서는 제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I’m coming back to the heart of worhip
And it’s all about You It’s all about You, Jesus
I’m sorry, Lord, for the thing I’ve made it
When it’s all about You It’s all about You, Jesus

저는 예배의 중심으로 돌아옵니다.
그것은 모두 당신께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 모두 당신께 대한 것입니다.
제가 예배의 중심인 것처럼 꾸며낸 것들에 대해서 용서하십시오.
그것이 모두 당신께 대한 것인데도, 예수님, 모두 당신께 대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의 핵심은 좋은 악기도, 실력있는 찬양팀도, 심지어 찬양곡 그 자체도 아닙니다. 예배의 중심은 바로 예수님 당신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명제를 잊고 예배의 주변 요소들이 마치 예배인 것처럼, 마르다의 모습으로 분주하게 예배를 드릴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아니라 예배 그 자체를 예배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기타 교본을 마무리 하면서, 저는 기타 연주법의 중요성을 폄훼하고자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도 많은 시간을 들여 찬양하고 연습하면서, 드디어 내가 원하는 찬양 곡을 내가 원하는 느낌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면 무한한 기쁨을 느낌니다. 그럼에도 저는 기타를 잘 연주하는 것이 좋은 찬양인도자가 되는 것의 필요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타 연주를 배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좋은 찬양인도자가 되기 위한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배 외적인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배의 중심(heart of worship)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며, 이를 가슴속에 간직한 자들의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작은 소원이 하나 있다면, 이 책을 읽는 당신이 그러한 예배의 중심을 가슴 속에 뜨겁게 간직한 찬양 인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당신은 이미 하나님 앞에 선 귀한 예배자입니다.

* 위의 글은 “예배 인도자를 위한 워십 기타 바이블”(예솔출판사,2009)의 마지막 장에 제가 쓴 글입니다. 아직도 찬양 인도자로서 서기에 너무 부족한 부분들이 많다보니 제가 쓴 글을 읽으면서도 스스로 부끄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예배를 준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슈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은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
– 푸슈킨
여러가지 환경이 어렵다보니 요즘 들어 특히 제 마음에 와닿는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