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제 전 기도의 의미와 신앙의 본질적 가치

오늘은 자칫 민감할 수도 있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남녀간의 교제는 중요합니다. 그것이 두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지요.

그래서일까요, 많은 교회에서, 혹은 기독교 단체에서, 형제와 자매가 교제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서로 맞는지 확인해 본 다음에 교제를 할지 말지의 여부를 결정하라고 합니다.

설명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서로 기도해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맞다면 Yes이건 No이건 그대로 결정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 중에 한 사람은 Yes이고 또다른 사람은 No인 경우는 한 사람이 잘못된 것이므로 동일한 응답이 있을 때 까지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떠한 목사님의 경우에는 "No"인 경우에 좀 더 우선권을 부여하라는 경우도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런데, 얼핏 보면 나쁘지 않아 보이는 이 '검증' 방법이 과연 성경적인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신지에 대해서는 한 번 깊이있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럼 case-by-case로 접근해보도록 합시다. 어느 교회에서 남자 A와 여자 B가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고 합시다. 혹은 어느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경우도 해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마음을 주고 받다가, 어느 단계에 이르러 결심을 합니다. 상대편과 교제를 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확실히 결정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기도해보고 응답 받은 뒤에 결정하자"고 하고, 기도한 후 며칠 후에 응답을 받아 그것을 서로에게 알려주기로 하였습니다.

이 경우 응답에는 3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겠네요. 한 번 각 경우들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⑴ 하나님께서 두 사람 모두에게 "Yes"라고 말씀하신 경우

이 경우는 가장 좋은 경우겠지요.

물론 이 때 하나님께서 "Yes"라고 말씀하시는 것에도 강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강추", "추천", "허용" 정도의 레벨로 나뉘지 않나 싶습니다만, 이 글에서 다룰 범위는 아니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이 경우 둘 다 하나님께서 "Yes"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앞으로의 교제에서도 큰 무리는 없겠지요.


⑵ 하나님께서 두 사람 모두에게 "No"라고 말씀하신 경우

이런 경우는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간혹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권고"를 따르도록 종용하는 '이성'과 상대방을 향한 '감정' 간에는 상당한 괴리가 존재할 수 있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가진 상태로 헤어지도록 마무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마지막 케이스입니다.


⑶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는 "Yes"라고 말씀하셨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No"라고 말씀하신 경우

...이제 머리 아픈 상황이 시작됩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요. 하나님이 두 분 인가요? 아니면 둘 중 하나가 마피아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인가요?

생각해봅시다. 먼저, 본인은 하나님께서 "Yes"라고 하셨는데, 상대편이 "No"였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말을 여러분이 들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대충 4가지 답이 떠오를 겁니다.

① 내가 "No"를 "Yes"로 잘못 들은 경우.
② 상대편이 "Yes"를 "No"로 들은 경우.
③ 상대편이 "Yes"라고 들었는데, 거짓말로 "No"라고 하는 경우.
④ 하나님께서 애초에 존재하시지 않기 때문에 서로 다른 답이 나온 경우.

① 번의 경우, 본인은 심한 신앙적 자괴감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즉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내 생각"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착각한 것이지요. "내 욕심으로 자매를 놓고 기도했나보군..." 정도면 그래도 나쁘지 않지만,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정말 제대로 못 듣는 것 같아.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올바른 응답을 주시지 않지?" 하는 식으로 나가면 본인의 영적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을 신앙 성장 자극의 계기로 삼을 수는 있겠지만요.

② 번의 경우에는, 상대편의 신앙이 정말 부족하다면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기도하고 결정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두 사람 모두 어느 정도 신앙의 수준이 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이야기이고, 결국 그렇게 되면 상대방의 신앙 수준을 '의심'해 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더구나 자신에게 100% 확신이 있으면 이제 정말 괴로워집니다. "기도 다시 한 번 해봐라" 라고 말하면서 무한 루프에 빠져들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 상대방에게 "Yes" 혹은 "No"를 강요하는 꼴이 됩니다. 이보다 더욱 문제는 ③, ④ 번의 경우입니다.

③ 번의 경우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②와 ③을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만, 여하튼 이 경우 상대편이 "하나님께서 Yes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네가 싫어" 하는 경우 그 사람은 불순종하는 신앙인이 되어버리고, 혹은 자신을 배려하는 마음에 아예 거짓말로 "하나님께서 No 라고 말씀하셨어" 하는 경우 이번에는 상대편의 신앙에 큰 균열이 갈 수 있습니다.

④ 번의 경우가 가장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둘 중 왜 한사람만 "Yes"라고 말씀하시고, 다른 한 사람은 "No"라고 말씀하셨는가? 혹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가짜가 아닌가? 라고 여겨버리는 일입니다. 신앙의 레벨이 충분하지 못할 때 분명 발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자신의 영적 자극제로 삼을 기회가 되거나 혹은 정말 잘못 들었을 때 이를 다시 한 번 놓고 기도해 보아야 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나는 Yes인데 상대방이 No라면 그것을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어도, 감정적으로 제대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위의 사례들은 상당히 극단적인 경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Yes, no라고 말씀하시기 보다는 "좀 더 시간을 두고 결정하라"는 형태로 응답하실 수도 있겠지요. 혹은 "자신의 생각"이 많이 개입되어서 두 사람의 기도 응답이 달라지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좀 더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경우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도록 기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저 역시 그런 생각들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기도하는 것은 좋은 행위라고 들었고, 중요한 결정 앞에서는 기도하라고 들었는데, 왜 저런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요. 왜 어떤 경우에는 상대방의 신앙을 뒤흔들 정도의 위험을 가진 행위가 되는 것일까요. 그럼 한 번 위의 "답안지"에 다섯번째의 답을 추가해봅시다. 그것은,

⑤ 우리의 기도 제목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입니다.

예, 저는 "기도하고서 마치 시험지 답안지 맞추어 보듯 서로 맞추어보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테스트"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질문하고 답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신앙적 행위가 단지 우리가 원하는 답을 강요하기 위해 하나님에게 질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점술가들이나 무당이 행하는 우상숭배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신앙의 본질은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테스트" 하려고 하니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거기에서 바로 이 "서로 기도해서 맞춰보기"가 가지는 행위의 위험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 번 질문해볼까요. 어떤 형제(혹은 자매)가 당신에게 와서 "하나님께서 당신이랑 결혼하라고 말씀하셨어요"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당신은 그 형제에게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하기도 싫은 형제라고 해 봅시다. 그런데 기도해봤더니 하나님께서 "결혼해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시다. 그럼 결혼할 건가요?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아닌 이상, 아마 "아니다"고 말할 것 입니다.

예, 이것이 중요해요. 이 상황에는 결정적인 것 하나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셨고, 종이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창조하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 상황에는 "나의 의지"와 "나의 책임"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혹시라도 억지로 교제를 시작했다고 해도, 교제를 하다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 그때 사귀라고 응답하셨잖아요? 이거 하나님 책임입니다" 이런 책임 전가를 허용하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들여 자유 의지를 부여하셨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교제 전 하나님께 물어보고 확인하기"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했던 사람은, 기도하고 확인해서 "맞았나 틀렸나" 그 답을 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괴상한 블라인드 테스트를 설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교제와 같은 인생의 중요한 결정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우선이다"라는 마음에서 이것을 계획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서 져야 할 책임을 떠넘기는 것에 대해서는 저는 반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허락하시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부여한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사랑하고 허락 안하시면 사랑 안 하는 그런 존재로 우리를 설계하셨다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이 "테스트"가 바뀌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우리는 모두 사랑에 대해 아마추어다

먼저 한 가지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 그 감정의 출처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감정을 설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짝사랑, 혹은 떠나간 애인에 대한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는 분이라면 "뭐 이따위 것을 다 만드셨냐"고 항변할지 모르겠지만, 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아픔까지도 사실 "사랑"이라는 영역에 모두 포함되는 것이지요. C.S.Lewis가 "내가 지금 아내를 잃음으로서 느끼는 이 슬픔은, 내가 아내를 사랑하면서 받았던 기쁨의 일부이다."라고 고백했던 것 같이, 밝음과 어두움의 색채가 함께 있어야 온전히(as a whole)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 같이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소 도발적인 논제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디자인한 그 감정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일반 은총이자 응답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나 좋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인가요? 물론 아니죠. 예를 들어 불륜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타락한 애욕이 만들어낸, 사랑이 아닌 변질된 욕정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감정을 설계하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가장 잘 움직이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그렇기에 저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Yes라고 말하시는가?"를 물어보는 것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 내가 상대방을 충만히 사랑할 수 있을까요?"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단순히 "잘 해주는 것"의 사랑의 의미가 아니예요. 내가 상대방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예수님이 인간을 위해 그러셨던 것처럼, 상대방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를 묻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에 대해 아마추어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남녀간의 사랑, 부모 자식간의 사랑, 친구 간의 우정, 우리가 가치있다 칭하는 뜨거운, 감동적인 사랑마저도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아가페(agape) 사랑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서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찾아보면, 사랑이 가지고 있는 속성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조건들을 갖추었다고 꼭 사랑은 아닙니다. 하지만 참 사랑은 이러한 속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13:4-7)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내 시간에 상대를 맞추기 위해 종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시간에 나를 맞추기 위해 기다려줄 줄 압니다. 인간의 그토록 많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아직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지 않은 것은, 인간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오래 참음이 바로 하나님이 가지신 사랑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온유(kind, 친절)합니다. 즉 사랑의 본질은 배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신의 모습을 버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한없이 낮아지셨습니다. 사랑은 내 기준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 나를 낮추어 가는 과정입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합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더 많이 가진 것에 대해 질투하고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줄 압니다. 부모님께서 우리보다 교육을 덜 받았다고 질투하지 않으시죠. 그것은 부모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합니다. 자랑은, 상대방은 가지지 않았지만 나는 가졌기 때문에, 그것으로 상대방에게 우월감을 드러내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반면 사랑은, 상대방이 가지지 않았지만 나는 가졌기 때문에, 내가 상대방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을 기뻐하는 행위입니다. 원인은 같지만, 기쁨의 이유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획 하나밖에 차이나지 않지만, 사랑은 자랑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 보면, 제가 하는 사랑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Yes, No를 듣기 위한 목표로서만 기도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성장하고, 상대방이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도록 간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 나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한 가지를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함께 꼭 다루어야 할,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범죄하기 쉽지요. 잘못된 결정을 내릴 때도, 잘못된 길로 갈 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때로는 기도를 우리의 욕심의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참된 기도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찰스 콜슨이 "이것이 교회다"에서 했던 말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뜻을 포기하는 것이다"

예. 그렇기에 하나님께 무언가를 "묻는다"는 것은 그 이전에 내가 "들을" 준비가 되어있느냐를 묻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기도는 나의 욕심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듣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No라고 말씀하신 상황들이 있습니다. 간음, 불신자와의 결혼, 동성애 등등.. 이러한 문제에서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거나 거래하는 것은 온전하지 못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이 때의 기도는 더 이상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지요. 이 때에는 "자기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나"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킵니다. 상대의 모습에 상관없이, 그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도록 내가 "충분히 커지는" 과정이지요. 그래서 기도는, 내 기준에 맞추어 상대방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더 낮아지고 더 섬기고 더 사랑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근본적으로 죄를 품고 태어난 이기적인 인간이, 비이기성과 이타성을 배워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그래서 바로 "사랑할 때" 입니다. 하나님의 멋진 설계이지요.


결론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소 장황하게 설명하였지만, 위와 같은 맥락에서 저는 교제 전에 하나님께 Yes, no에 대한 응답을 '얻어내는 것'이 바람직한 기도인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집니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상대방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충만한 사랑으로 헌신하며 섬길 수 있을 것인지 질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히려 교제 이후가 더 중요하지요. 하나님의 Yes로 시작했다가 나의 No로 끝내는 교제가 아니라, 늘 지속적인 기도와 함께 매 순간 Yes, no를 듣는 기도로 바꾸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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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ghwan

2009/03/29 07:01 2009/03/29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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